당연하게 여겨져 더이상 주목받지 않는 것들,
우리가 무뎌진 것들이 무엇이 있을지 자주 생각한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더 모르겠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낱낱이 볼수록 더 알 수 없는 것들.

어떤 아름다움은 자신을 찾아주기를 조용히 기다리는가 하면
어떤 아름다움은 “나를 봐!!”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보여지는 모든 것들엔 저만의 울림이 있다.
이를 드로잉이나 콜라주로 담아내는 것은 무형에 유형의 옷을 입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인상, 생각, 정취로 관객에게 돌아가며 다시 무형이 될 것이다.
내가 본 작은 것들을 당신이 함께 보진 못했지만, 지금 이곳에서 내가 옮겨온 그들의 울림을 함께 보고 있다.

어떻게 보아야 진짜 본 것인가?

보여지는 것만이 볼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아파트 단지에 이렇게 아름다운 잎을 피워내는 나무가 있었던가.

차갑고 거친 아스팔트 도로 위에 있던 잎을 주워 나뭇결이 고운 거실 탁자에 올려두니 그제야 잎은 저의 자리를 찾은듯했다.

사랑이 흘러넘치면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되듯이 아름다움도 이와 비슷한 성질이 있다—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홀리는 아름다움은 표현하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든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담아보고자, 다가올 결과를 모르고 아주 호기롭게, 하얀 종이와 파스텔로 잎을 그리기 시작했다.

불과 한 뼘 남짓한 나뭇잎은 비슷한 무늬로 제 몸을 가득 덮고 있었는데, 이는 불규칙해 보이지만 저만의 당당한 질서가 있었다. 누가 밟았을지도 모르는 잎을 굳이 집으로 가지고 온 것도 이 알 수 없는 질서에 마음이 뺏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을 종이에 옮겨오려고 할 때부터였다. 선을 조금만 규칙적으로 쓰면 그림 속 잎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고 생기를 잃어갔고, 무작위로 선을 쓰자니 어쭙잖게 추상적인 표현을 따라 하는 아마추어의 그림 같아지는 게 아니겠는가. 규칙과 우연 사이, 그 어딘가를 하염없이 뛰노는 나뭇잎을 감히 담아낼 수 없었다.

아, 자연 앞에서 인간이 겸허해지는 건 꼭 규모 때문이 아닌 것이다. 거대한 폭포와 산이 아니라도 작은 나뭇잎 하나가 가진 비밀에도 집채같은 압도감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완벽히 설계되어 빈틈이 없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혼돈과 자연이 동일하냐면 그 또한 틀린 말이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흐드러지게 핀 꽃들부터 앞다투어 자란 잡초, 여기저기 뭉게뭉게 떠있는 구름, 순서 없이 빽빽이 자란 나무들 그리고 제멋대로 뻗어난 가지들까지 그 모든 것에서 이상하고, 또 희미하게 도사리는 어떠한 규칙이다.

사람이 설계한 것과 자연이 설계된 모습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자연의 설계는 훨씬 정교하고 미묘해서 마치 비밀과도 같은데 저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제모습을 드러낸다.

플라톤은 예술이 단지 모방에 불과하다고 봤다. 아무리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시대를 초월한 명화라 할지라도 그저 계절의 순리에 따라 도로 위에 진 나뭇잎의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견줄 수 없다는 말이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실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보고자 손을 뻗는 것이 예술가의 평생의 업이라면 그로부터 나올 수 있는 최선 혹은 최고의 결과는 결국 모방이지, 실재의 완벽한 구현은 아닌 것이다. 이는 완전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주와 유에서 유를 조합할 뿐인 인간의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간극의 방증이다.

빛을 아는 인간은 얼마나 자유한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다다르기를 염원하는 건 절망뿐이지만 빛이 숨겨놓은 비밀을 풀어나가는 건 환희다. 작음에서 오는 큰 기쁨이다.

언제쯤이면 빛이 숨겨놓은 모든 비밀들을 티끌이나마 표현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작은 나뭇잎 하나로 함께 작아질 수 있음에 여전히 마음만은 평안하다.